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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엑소더스
Mar 6, 2018
5 minutes read
* 주변인들이 겪은 일들을 재구성하여 집필하였음을 명시합니다.

다음날,

“밥 먹으러 가요~”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이동한다. 밖으로 나오면서 한 분이 나를 부른다.

“형.”
“네?”

“만일 교수님이 양보해서 6월까지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건 어제에요. 이젠 4월입니다.”
“아하…”
“크크 뭐 글쎄요. 솔직히 좀 고민할 거 같긴 하네요. 그때 상황 봐서 대응해야겠죠.”

“무서워요.”
“무서울 거 뭐 있어요.”
“아니요, 두 분 모두.”
“에이 그러지 마요.”

랩 구성원들과 점심을 먹는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점심이다. 아, 다른 데는 맛있던데 공대 밥은 왜 이렇게 맛없는 거 같지.

미팅 5분 전이다. 정확히는 과제 미팅 5분 전이다.

이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과제 미팅을 준비하는 나도 미친 것 같다. 하지만 본디 끝까지 책임은 져야 한다. 나가더라도 최소한의 마무리라는 것은 하고 나가야 뒤탈이 없다.

미팅 2분 전, 논문과 필기도구를 들고 의 사무실을 두드린다.

“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그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진행되는 미팅. 마치 지난 일주일이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오늘은 논문자격시험 요청 마지막 날. 오늘이 지나면 끝이다.

“자, 그럼 다음 미팅은…”
“교수님.”
”… 그래”
“랩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거 같습니다.”
”… 그래. 알았다. 랩장도 불러서 다시 오기 바란다.”
“네.”

방문을 나선다. 랩장을 부른다. 무슨 의도일까.

짧은 시간 생각해보았지만 모르겠다. 랩 실에 들어가 랩장에게 자초지종을 말한다. 랩장도 놀란다. 갑자기 왜? 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불렀으니 가봐야지. 랩장이 주섬주섬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챙긴다.

내가 랩 실을 나서면서 말한다.

“저의 목표는 빠르면 이번 주입니다. 늦어도 4월입니다.”

랩장은 특별히 말이 없다. 묵묵히 걸을 뿐이다. 걱정이 많아 보인다. 과연 가 무슨 말을 할지 자신에게는 또 무슨 질문을 할지. 그리고 옆에 있는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내가 나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계속 남아 있어야 하기에 고민이 많을 것이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나, 랩장 그리고 와의 삼자대면이 개최되었다.

“음… 내가 랩장을 같이 부른 건 우리 둘의 대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사람이기 필요하기 때문이야.”
”… 네, 그렇군요.”

우리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데 이 자리에서 누가 객관적일 수 있단 말인가.

“우선 현재 상황을 설명해 볼게, 잘 들어봐.”

가 랩장과 내 앞에서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있고, 랩장은 고개를 숙인 채로 듣는다.


“그래서 말이지 이런 상황이 되었다.”
“네.”
“아무튼, 내가 그래서 어제 알아보니까 수료증에 날짜가 8월로 찍힌다고 하더군. 그렇기 때문에 네가 8월까지 일하는 게 맞는 거야.”

하하. 어제 행정실에 왜 수료증에 찍히는 날짜를 묻나 했다. 도대체 어느 교수가 수료증에 찍히는 날짜를 궁금해하겠나. 수료는 막을 수 없으니 이제는 수료증에 찍히는 날짜로 어필하는 건가. 지금 이걸로 나를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어제 전화로 이미 내가 당장 그만둬도 수료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인제 와서 나에게 도덕적으로 호소하는 것인가.

아니, 차라리 부탁하는 자세로 말했어야죠. 그래야 말이 되는 거죠. 이건 너무 하잖습니까. 제가 이런 거까지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가요?

행여 6월까지 하라고 하면 어떡하나 고민했던 내가 우습다. 어젯밤 당신을 위해 더 많은 시나리오를 생각해왔는데 좀 아깝다. 고민했던 나 자신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잠이나 더 잘걸. 이 미팅을 시뮬레이션까지 했던 동료들에게도 미안하다.

“8월은 어디까지나 행정적인 절차에 의해 찍히는 겁니다. 수료와는 상관없는 일정입니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행정적으로는 8월이지만 그게 제가 8월까지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번부터 말하지만, 협상의 의지가 없고 통보식으로만 하는구나! 그게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자세인가!”

하아… 분노가 차오른다.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는군.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질려버렸다. 스스로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는 그 오만과 학생들을 구워삶을 수 있을 거라는 그 기만과 당신의 생각을 모를 거라는 그 교만에 질려버렸다. 그대의 교활함이 썩어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그래, 내가 좀 정리해주마.

나는 지금 졸업을 포기했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걸 버렸단 말이다. 당장 나가도 수료임에도 불구하고 6월까지 나온다고 한 번 더 양보했다. 지금 나는 내 1년 반 동안의 인생을 화장해서 바람을 태워 떠나보내는 심정이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당신은 더 강한 요구를 할 뿐이었다. 심지어 서명한 서류를 반려하려 했고, 어떻게든 빈틈을 찾으려 학생과 행정실에 문의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욕적으로 느낄 만큼 어이없는 이유를 들먹이며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려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냥 솔직해져라. 과제를 해야 한다고. 그래야 내가 돈을 벌 수 있다고!

내가 쓴 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던가? 거기에 내가 당신 욕을 써놨어도 당신은 몰랐을 거다.

당신이 던지는 과제와 일감들을 주구장창 처리하면서 공부할 시간도 논문 쓸 시간도 없이 일을 해왔다. 근데도 당신은 기도 안 차는 과제 돌림과 180/250만 원 논리로 학생들의 이득을 얼마나 많이 취득해 오지 않았느냔 말이다. 스스로 너무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가.

당신 생각에 이견을 말할 때마다 ‘당연한 거야’, ‘원래 그런 거야’, ‘그게 맞는 거다’ 라며 묵살하는데, 이 세상에 당연하고 원래 그렇고 맞는 건 너와 나는 동등한 인격체라는 거 하나밖에 없다.

‘최선’, ‘진지’ 따위의 단어를 언급하는데, 거기에 당신의 유학 생활을 들먹이지 마라. 당신이 유학 생활을 거렁뱅이로 했든 금수저로 했든 그딴 건 궁금하지 않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차라리 풀펀딩을 해서 과제를 시키지 말던가, 아니면 그만한 환경을 제공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은가. 차라리 김일성 대학과 비교하는 게 설득력 있겠다.

지금까지 박차며 나간 학생들을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 했나. 그들이 나약하다며, 심지어는 여자가 참을성이 없어 쉽게 관두어서 여자 교수가 적다는 이야기까지 했지.

세계 최고의 연구를 하는 석학이라고? 세계 최고 수준의 랩이라고? 아니, 여긴 그냥 수준 떨어지는 곳이다.

천장을 한 번 바라본다. 숨을 한 번 쉰다. 말하지 않으리라. 어차피 말해서 바뀌지도 않겠지만, 가 바뀌면 안 된다. 가 스스로 무너지게 놔둘 것이다. 스스로 너무 탐하여 자신마저 먹어버리기를.

“아니, 교수ㄴ”
“안 되겠다. 이 랩을 나가라. 오늘부터 너는 랩의 구성원이 아니다. 오늘 내로 정리하도록 해.”

“그래도 최소한의 인수인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번 주 내로 마치겠습니다.”
“뭘 인수인계해?”

“개인 연구도 있고 과제도 2개 진행 중입니다.”
“네 주제 뭐 대단하지도 않은 거 그냥 가. 과제도 알아서 할 테니까 가.”

이젠 카드가 없나 보군. 게임이 끝났으면 판을 정리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뭐 1년 반 동안 해왔지만 좋은 성과를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여기서 배운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고, 감사했습니다.”
“어디서 너에 대해 좋은 얘기 나올 생각은 하지 말아라. 좋은 이야기가 나오겠니?”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매번 협박하듯이 뱉는 그 말. 아는 사람이 많아서 연락만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라는 듯한 말. 이 말이 왜 나오지 않나 했다. 화룡점정이다. 언제부터 우리의 대화가 당신의 자존심 싸움이 되었나.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지를 몰라.

“네, 그럼 저도 얘기 많이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지막 인사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보일 마지막 예의다. 의 방에 남아있는 랩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랩장은 어떻게 말할 기회도 없이 회담이 끝나버렸다.

사무실을 나온다. 랩실로 돌아온다.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여러분, 저는 오늘 랩을 나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