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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의 3단 원반
Mar 5, 2018
4 minutes read
* 주변인들이 겪은 일들을 재구성하여 집필하였음을 명시합니다.

어느덧 새싹이 자라는 3월이다. 학기 초는 다들 정신없이 바쁘다.

“형”
“네?”

“이번 학기 대체이수신청서나 학점인정신청서 서명받을 거 없어요?” 1
“아, 오늘이 마감이죠? 아까 미리 냈습니다.”
“어? 지금 교수님한테 서명받으러 가는데 언제 받았어요?”
“저번에 받아 놓은 게 있어요.”
“그렇군요.”

“근데 교수님과 일은 잘 풀릴 거 같아요??”
“그럴 리가. 하지만 뭐 그냥 그런대로 가는 거죠. 매 순간이 떨리네요.”
“하아… 정말 교수님도 참 너무하시네.”

와의 미팅이 있었던지도 어느덧 열흘 하고도 하루가 지났다. 는 3월 8일로 미팅 날짜를 못 박았지만, 이대로 가면 가 의도한 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어젯밤 에게 면담 요청 메일을 보냈다. 는 면담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식으로 요청한 면담을 지도 교수가 거절한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는 것을 도 잘 안다. 의 답장에는 저번처럼 평행선 같은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했다.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래, 는 항상 그래왔지.

어차피 내가 한 학기를 더 한다 해도 는 언제든지 말을 바꿀 수 있으며, 지금보다 더 저자세로 를 받들며 지내야 한다. 졸업하여도 계속 나의 이력서에 쫓아다니는 의 이름을 봐야 하며, 끊임없는 나에 대한 편파적인 평가를 들어야 하겠지. 더 얽히기 전에 여기서 끊어야 한다.

미팅 2분 전, 가져갈 서류도 없다. 문을 두드린다.

“네~”
“네, 안녕하세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석박에서 석사로 바꾼 점과 논문 퀄리티가 내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졸업을 이번 학기에 하는 것은 어려울 거 같다.”
“네,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가 살며시 미소 짓는다. 다시 한번 는 자신의 단단한 권위를 확인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다. 이제 나는 너의 그 악취미에 동조하지 않는다. 엄석대 놀이는 여기까지다.

“그래서 이번 학기를 끝으로 저는 졸업하지 않고 수료만 하기로 했습니다.”

”?? 수료?”
“네, 수료요. 졸업 없이 과정만 끝내는 거죠.”

“아니, 그 제도는 또 뭐지?”
“말 그대로 졸업이 아니고 수료입니다. 논문 없이 과정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게 의미가 없을 텐데?”
“뭐, 아쉽지만 그렇게 됐네요.”

약간의 정적이 흐른다.

“아니, 그럼 이력서에는 뭐라고 쓸 건데?”
“있는 그대로 쓰겠죠.”

“보는 사람이 궁금해하지 않을까?”
“그러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겠죠.”

“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지?”
“제가 교수님과 많이 다른가 보죠.”

예기치 않은 대화의 흐름과 나의 거침없는 뻔뻔한 대답에 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는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말을 꺼낸다.

“너 오늘 나에게 서명받은 거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정말 없어?”
“네, 저는 따로 받을 게 없어서 오늘 받지 않았습니다.”

가 이걸 물어본 것은 아마 오늘 받은 서명 받은 서류가 있으면 이를 서명 취소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요한 서류를 못 내면 수료도 못 하게 될 것이고 그럼 내 앞의 저 학생을 굴복시킬 수 있다. 잠시 생각하더니 도 자신이 서명한 것에 내 이름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는지 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는 방학 때 내가 수많은 결재 서류들 사이에 수료에 필요한 서류도 같이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당시는 졸업 여부를 떠나 응당 받는 서류였고2 별생각 없이 서명하였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는 나에게 오늘 “제출한” 서류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는 항상 강조했지, 연구할 때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고.

”… 그래 알았다. 뭐 내가 아쉬울 거 있나.”
“네, 그럼 제가 마무리해야 할 것을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어느 정도 할 일을 정해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한 번 미루면 자신이 의도한 시간까지 끝까지 미룰 것이다. 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그러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는지 말을 꺼낸다.

“그럼 8월까지 하는 거로 생각하도록 하자.”
“네? 기간이 아니라 일감으로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8월까지 해야지. 그게 당연한 거야. 지킬 건 지켜야지.”
“저는 늦어도 6월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학기 기준으로도 6월이 끝이고요. 8월까지는 너무 기간이 깁니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수료까지 하는 것도 이해하겠는데 6월이라고? 도대체가 협상의 의지는 있는 건가? 미리 대화를 준비해 놓고 이건 통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다른 학생들도 다 그렇게 하고 나갔어! 난 더는 너를 지도할 수 없다. 그냥 자퇴해. 왜 여깄어! 자퇴하라고 그냥.”
“교수님, 잠시 제 마ㄹ..”
“나가!”

”… 알겠습니다.”

는 내가 협상의 의지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였지만, 수료하겠다는 것은 졸업을 이번 학기에 할 수 없다는 의 조건을 나름 수용한 것이다. 단지 가 바라던 “한 학기 더 있겠습니다.“가 아녀서 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가 협상을 원했다면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

  • 자신에게 어떠한 불만이 있는지 좀만 더 진지하게 물어보던지,
  • 과제에서 모두 제외를 해줄 테니 그럼 한 학기 더 다니는 동안 논문을 완성하게 도와주겠던지,
  • 뭐 최소한 다른 떡밥은 던져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는 또한 8월까지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바르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내세우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내면적인 이유는 내 자리를 대신 채울 사람을 9월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은 누구에게 맡겨, 과제는 누가 해! 소는 누가 키우냔 말이다!!

그리고 자퇴라니. 어떻게 지도 교수가 자기 학생에게 자퇴를 종용한단 말인가.

자리로 돌아온다. 랩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동료들은 오늘 하루 동안 미팅을 준비하면서 가 어떻게 나올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동안 의 말과 행동들을 기억하고 유추하고 시뮬레이션까지 하면서 나를 도와주었다. 대부분 맞아 떨어졌으나 마지막이 아쉬웠다. 그들에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간중간 한숨들이 터져 나온다.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내일 나는 또다시 과제 미팅이 있다. 아마 이것이 협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랩 전화기가 울린다. 모두가 조용해진다. 그렇다. 그에게서 온 전화다.


  1. 대체이수와 학점인정신청서를 통해 수료나 졸업에 요구되는 조건을 채워야한다. 예를들어 4개의 과목을 수강했더라도 분야A, B, C, D 이렇게 한 개씩 들어야한다. 그리고 수강한 과목을 어느 분야에 배치할 지 대체이수나 학점인정신청서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 [return]
  2. 졸업 요건은 수료 요건을 포함한다. [ret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