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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못의 숲
Feb 22, 2018
6 minutes read
* 주변인들이 겪은 일들을 재구성하여 집필하였음을 명시합니다.

내일 오전까지 졸업 예정 일자를 보내야 하지만 밤 11시가 되어가도록 에게서 답장이 없다. 정 안되면 내일 있는 미팅 자리에서라도 꺼내야 한다.

이는 가 난감해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는 스스로가 꼼꼼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고 실제로도 이런 단순한 행정처리는 지금껏 빨리빨리 처리해왔다. 그런데 그런 가 이렇게까지 답이 늦는다? 그렇다. 지금 는 고민하고 있다. 가 고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 내가 석박통합에서 석사만 하겠다고 말했을 때 는 아쉬워했지만 알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괘씸(?)하다고 생각했는지 나 이후에 석박통합에서 석사만 하겠다는 사람과의 면담에서는 최소 한 학기 더 다니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아직까지 나와의 면담에서는 이를 말할 기회가 없었다. 만일 내가 4학기 내로 졸업을 해버린다면? 앞으로 랩 운영에 있어 위험한 선례다. 그래서 는 내가 4학기 내로 졸업하는 것이 맘에 안 든다. 그러다 졸업 예정자를 조사하는 메일이 왔다. 만일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내가 이번 학기로 졸업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 입장에서는 이번 메일을 자신의 계명을 엄포할 기회로 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졸업 예정일을 미루어서 보내버리면 내가 당장 들고일어날 것이 너무 뻔하다. 는 아마 나에게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을 십분 후회하고 있을 거다.

근데 솔직히 이번 메일은 어차피 조사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뿐이고 졸업을 확정 짓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아무런 효력이 없다. 하지만 어느 선택을 하든 파장은 크다.

자, 어여 선택해라!

내가 이렇게 를 시험하게 된 이유는 뭘까. 분명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는 지속적으로 실망스러운 언행을 해 왔다. 그것이 쌓이다 보니 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이젠 의 잔망스러운 행동들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메일을 기다려보며 와 관련된 일을 몇 가지 떠올려본다.

1. 지도 교수 교체 사건

학부생이 이번에 복학하기 위하여 한테 서명을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랑 약속을 잡았는데 그 학생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학생이 급한 일이 생겨 미쳐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학생은 후에 이를 죄송하다며 다시금 약속 시간을 잡아드리기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는 답하지 않았다. 학생이 다시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는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복학 신청 마감 이틀 전 는 학생에게 메일을 보낸다. 하지만 학생은 그사이에 지도교수 변경 신청을 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다른 교수한테 서명을 받아 제출한 뒤였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자 는 격노하여 학생에게 분노의 메일을 보냈는데 내용이 가히 위압적이다. "내가 메일을 답변이 늦은 것은 의도된 바였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회생활 할 것 같으냐.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오래도록 너를 기억할 것이다."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2. 동방예의지국

가 살면서 제일 신경 쓰는 것은 "예절"이다. 우선 메일 말미에 "감사합니다. ㅇㅇㅇ 올림"이라는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답변을 보낸다. "감사합니다" 빼도 감사하는 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면서 써야 한다는 메일이 온다. "올림"을 "드림"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예의가 아니라면서 한 마디 던지는 메일이 온다. "네, 알겠습니다." 이 한 마디 보내는 데에도 우리는 감사해야만 한다.

의 예의는 수업 시간에도 발휘된다. 는 서양권에서 오는 학생들에게 한국에서는 한국 예를 따라야 한다면서 자기가 수업시간에 나타나면 고개 숙여 인사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출석을 부를 때 밝게 손을 흔들며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해도 는 못마땅해한다. 가 원하는 것은 "제가 감히 교수님을 마주합니다."라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자신이 불편하면 예의에 어긋난 거다.

3. 나는 말이야.

는 10 to 101과 일만 시간의 법칙,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내일 당장 죽어도 남들이 이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등 자기 계발서의 목차들을 따온 듯한 말을 한다. 그리고 맘에 안 들면 이런 말을 토대로 학생에게 면박을 준다.

예를 들면, "너 주말에 뭐했어, 주말에 나왔어? 주말에 점심은 뭐 먹었어?" 질문도 이상하지만, 가 이 대화에서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말이야 유학할 때 연구하기 위해서 점심 저녁 도시락을 사 들고 와서 나가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서 일했어."이다.

이런 적도 있었다. 중국인 유학생이 설에 본가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내가 유학할 때는 1년에 한 번도 가기 힘들었어." 솔직히 한국-미국 거리는 한국-중국 거리의 몇 배이고 가격도 몇 배이고 중국인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부부이다. 그 친구도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예의는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4. 기부

랩 공용 노트북이 망가졌다. 사용하다 보면 으레 망가지는 것이니 이를 수리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견적을 내어보니 대략 40만 원이 필요한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는 거기에 쓰는 돈이 아쉬웠다. 과제비는 자기 통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찌 공용 노트북 수리 따위에 쓸 수 있단 말인가! 는 곰곰이 고민하다 묘수를 하나 생각해낸다.

이번에 랩 인턴이 휴먼테크 금상을 받는데 그 상금이 무려 1000만 원이나 되지 않던가! 이걸 사용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는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500만 원 이상의 상금을 수상할 경우 5%의 금액을 랩비로 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50만 원을 노트북 수리하는 데 쓰고 나서야 상을 받은 학생에게 수상을 축하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정말 축하의 메일이었을까. 자신의 새로운 계명에 대해 좋은 선례를 만들어준 학생에게 고마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이 사례는 '당연한 거고, 원래 그런거고, 그게 맞다'는 말을 하기 위한 논거로써 활약할 것이다.

참,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지도 교수는 따로 상금으로 500만 원을 받는다. 하지만 25만 원이 랩비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5. 6. 7...

이뿐 만이 아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한다든지, 툭하면 반성문 작성하라고 한다든지 상대방의 자존감을 깎는 방식으로 권위를 확인하려는 방법을 지속해서 행해왔다. 심지어는 설날, 추석, 스승의 날 등 기념일에 감사의 메일을 안 쓰면 안 쓴 사람을 체크하여 따로 메일을 보내 감사할 줄 모른다고 친절하게 메일을 보낸다. 블랙리스트가 따로 없다.

지친다.

어쩌면 는 돈도 돈이지만 열등감 혹은 애정결핍에 사로잡혀있었던 거 같다. 어느 부분에서라도 자신이 대접받는 느낌이 들고 싶어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고, 어느 사소한 구석에서든 웃어넘기지 못해 자신에 대한 애정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럴수록 주변은 점점 형식적으로 변할 뿐이고, 그러면 더 강력한 방법으로 인정을 요구하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다.

웅 우-웅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핸드폰이 알림이 떴다.

알림에 의 이니셜이 보인다.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그렇다. 답장이 온 것이다.


  1.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열 시까지 랩에 근무하기 [ret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