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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노인
Aug 17, 2018
5 minutes read

"어이쿠 나 좀 앉자."

지하철 의자 끝 구석 자리에 앉으려는 나를 누군가 끌어당긴다.

지하철은 방금 역에 정차하였고 내 앞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40분 정도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나는 다행이다 싶어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였다. 그렇게 앉기 직전 방금 탑승한 한 노인이 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얼떨결에 자리를 빼앗기고 나는 다시 내가 앉으려던 자리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웬 노인인가 싶어 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검버섯이 있는 거 보니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이기는 한다. 양보하고 그런 건 다 좋은데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고맙소'라는 말은 안 해도 뭔가 양보한 사람에게 일말의 표현도 없이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고 있다.

어쩔 수 없지 뭐. 텁텁한 마음이지만 나도 핸드폰으로 뉴스를 본다.

그렇게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니 노인 옆자리가 비었다. 하지만 내 옆에 서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 잽싸게 자리에 앉는다. 그래... 이 또한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또 한 10분이 지나니 다시 노인 옆자리가 비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자리 앞에 있던 또 다른 여인이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이것이 서울 지하철 아니겠는가.

각각 상황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갈 수 있지마는 사건들이 이어지니 맥락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괜히 이 노인 때문에 손해를 본 것만 같다.

다시금 노인을 내려다본다. 여전히 핸드폰 중이다.

근데 네이버 앱이 연결에 문제가 있는지 메뉴 화면만 뜨고 나머지는 하얗다. 나한테서 자리를 받아갔을 때부터 계속 그랬나 보다. 그가 주변을 살핀다. 자신만 인터넷이 문제가 있는 것인지 살피는 눈치다. 자기 옆 사람은 무슨 사진을 보고 있고, 저 사람은 무슨 동영상을 보는 거 같고, 내 앞 젊은이도 별문제 없는 거 같은데 왜 자기만 그런지 모르겠다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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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그가 갑자기 나의 팔뚝을 치고 하얗게 뜬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말한다.

"이게 왜 이게 안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이고... 할아버지.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하나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순간의 어이없음에 나도 모르게 대충 대답하고 말았다.

"근데 여기 인터넷 연결이 되어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느려질 수 있어요. 그냥 데이터 쓰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

그도 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애초에 내 핸드폰도 아니고 문제점이 뭔지 알 수가 없으니 나서기가 어렵다. 아, 뭐, 그래 좀 더 감정적인 이유는 내가 서 있게 된 경위 때문도 있다. 그가 데이터 요금을 모르는 건 아닐 거다. 아마도 데이터를 다 썼을 거다.

하지만 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것인지, 그는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인터넷이 되나 안되나를 확인하고 있다. 핸드폰을 만지는 그의 손동작에서 많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자니 나도 괜히 답답해진다. 앱을 그냥 내렸다 올렸다만 하지 말고, 앱을 종료하고 다시 켜보던가, 무선 인터넷 연결을 끊었다 다시 연결해보던가, 다른 앱은 잘 동작하는지 살펴보던가, 아니면 그냥 핸드폰을 덮고 쉬든가 하셔야지. 계속 안 되는 걸 그냥 이리저리 돌려본다고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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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번만 더 지켜보자'를 다짐한 지 세 번째 그는 여전히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다. 거참 자꾸 이러시면 내가 나쁜 놈이 된 거 같잖소!

"잠깐 줘봐요."

그가 아무 반응이 없다. 귀가 안 좋으신갑네. 내가 그의 손을 툭툭 건든다. 그가 나를 바라본다.

"핸드폰 좀 줘보세요."
"응?"

내가 그의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잠깐 줘보라고 해본다.

"제가 다시 한번 볼게요."
"어, 어..."

핸드폰을 받아든다. 당장에 네이버 앱을 완전히 종료를 시킨다. 그런 다음 다시 네이버 앱을 켜본다. 그런데도 네이버 앱 화면이 여전히 하얗다. 그렇다면 네이버 앱이 지금 내부적으로 꼬인 것은 아닌 거 같다. 인터넷 연결 상태를 본다. 신호 세기는 빵빵한 데... 그러면 AP가 정말 사용자가 많아서 느린 것인가... 아, 괜히 한 번 더 확인해보겠다고 했네.

그러다 불현듯 AP 이름을 확인해본다. T wifi 이다. 핸드폰의 통신사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KT이다. 이런이런, 문제가 여기 있었구먼. 인터넷 설정에 들어가서 T wifi 네트워크 프로파일 삭제하고, KT wifi에 연결한다. 1초 2초 3초...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네이버 앱을 다시 켠다. 그토록 바라던 네이버 메인 화면이 인제야 뜬다.

그에게 다시 핸드폰을 돌려준다. 그가 핸드폰 화면을 보더니 흠칫 기뻐한다.

"어... 어... 허허허."

그가 나를 잠깐 본다. 머쓱한 웃음이다. 별말이 있지는 않았다. 뭐...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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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이제 일어나시는구먼. '잠깐이라도 앉아 갈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던 순간 한 여인이 내 앞에 끼어들어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버린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을 본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앉는 건 포기해야겠다.

노인이 지하철에서 내린다. 지하철 유리로 비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수줍음 많은 그대, 잘 가시오.

그를 떠나보낸 지 5분 후, 지하철은 어느덧 목적지인 성수역 도착하였다. 그렇게 40분간의 지하철 여정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