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문래역이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열차에서 내린다. 휴우... 낄 뻔했네. 행여나 두고 내린 게 없나 몸을 이리저리 만져본다. 가방도 챙겼고 핸드폰도 있고 지갑도 있고... 다행히도 두고 내린 물건은 없는 거 같다.
신촌역과 이대역 사이에 있는 치과를 방문하고 낙성대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하다 지금쯤 어디에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하철 유리창을 통해 벽면을 바라보았는데, 문래역이라는 글자를 보고 말았다.
집구석 오래된 앨범을 발견하면 언뜻 꺼내 보듯, 문래역이라는 글씨를 보고 얼핏 떠오른 기억에 우선 내리고 본 것이다.
--삑!
개찰구의 삼발이를 밀어낸다. 꽤 무게감이 느껴진다. 문래역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을 본다. 와본 지 그렇게 오래된 거 같지는 않지만 낯설다.
음... 이쪽인가? 지하철역 내부에 걸린 지도를 본다. 문래역 7번 출구였던 거 같긴 한데... 방향이 좀 의심되긴 하지만 걸어본다. 문래역 7번 출구에 다다르고 들어오는 빛을 향해 하나씩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온다. 마음이 엉켜있고 정리 안 된 기분이다. 날도 더운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잠시 머뭇거리나 이왕 내린 거 지하철 통행료도 아까운데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밖을 나와 주변을 보니 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기억이 있다는 사실에 좀 더 확신이 들 뿐이다. 마치 오래된 전공 지식을 떠올릴 때 대충 어떤 게 있었다는 건 점점 기억나는데 그 내용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지금 나는 문래창작촌1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문래창작촌은 수많은 공방과 철강소가 함께하는 곳이다. 이곳은 거칠다. 너무나도 거친 곳이다. 부드러움과 깔끔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침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버려진 것이 거친 입안으로 들어가 질겅질겅 소화되어 뒤를 통해 나온다.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곳이다. 정말 말 그대로 더럽게 아름답다.
공장들 사이를 걷는다. 공장 사잇길 한복판을 걷고 있자니 크고 덩치 큰 공장이 나를 흘겨보는 것 같다. 하긴 베이지색 셔츠와 그리너리 바지를 입고 있으니 무슨 검은흙 위에 피어난 수선화인 마냥 홀로 고고하다. 살짝이라도 건들면 금세 지저분해질 것 같은 느낌에 그들의 입김마저 조심하며 길고양이처럼 지나간다.
--위이이잉. 깡.. 깡..
쇠 깎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공장들에서 새어 나오는 열기가 나를 덮는다. 세상이 여름이든 겨울이든 연연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열기다.
--크읔...
갑자기 매캐한 쇳가루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헛기침하며 잠시 멈추어 선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다. 저렸던 팔에 피가 흐르며 감각이 살아나는 것처럼 머릿속 한구석이 살아난다. 발걸음이 속도를 낸다. 다시 한번 쇳가루 향을 맡는다. 걸음마다 낯섦은 익숙함으로, 어색함은 친숙함으로 변해간다.
그래, 나는 분명 이곳에 왔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어느 한 전시공간이다. 처음 창작촌을 왔을 때는 어떻게 이런 공장들 틈 속에 전시회가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알던 전시회는 보통 엄청나게 넓은 건물 혹은 층을 빌리고, 그 안에 방들이 미로 같이 연결되어 있고, 각 방은 전부 흰색 혹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방마다 하나 혹은 두 개의 작품들이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전시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 전시들은 이러한 내 고정관념에 대해 어떠한 것도 맞지 않았다. 전시공간은 10평을 넘는 경우가 없고, 방은 하나 아니면 두 개, 벽은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 경계선 없이 섞여 전시된다.
어!... 사라졌다.
도착해 건물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곳은 더는 내가 기억하던 곳이 아니었다. 혀가 떫다. 그래도 계단을 올라간다. 문고리를 잡아 돌려본다. 아, 잠겨있다. 비록 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공간이 비어있음을 직감한다. 그래, 더이상 이곳은 전시를 열지 않는다.
어째 좀 잔인하게 느껴진다. 최대한 저렴한 곳일 텐데 이마저도 유지하기 힘든 현실이란 얼마나 야박한가. 넓은 방을 자기 자신만으로도 채울 수 있는 작품들이 비록 좁더라도 서로에게 조금씩 양보하며 자리 잡았을 텐데 그마저도 사치였다. 이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하나는 쓰레기통 옆에 전시되어 있을 것이요, 다른 하나는 유해도 찾지 못할 만큼 녹아버리고 사라졌겠지.
계단을 내려온다. 왠지 허무하다. 괜히 왔나. 이런 걸 느끼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밖에 나와 다시 한번 건물 위층을 바라본다.
--빵빵!
철근을 옮기던 트럭이 길을 비키라고 한다. 건물 쪽으로 밀려나면서 더 이상 건물의 위쪽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다시금 쇳가루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다음은... 이쪽이었나.
그때 당시 방문했던 카페를 향해 가본다.2 전시장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지만, 철공소들 사이에 묘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도 카페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기쁨 반 떨림 반의 마음으로 카페 문 앞까지 다가간다. 문 유리창을 통해 보니 그녀와 함께 앉았던 자리가 비어있다. 그녀와 같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서로 이야기하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문손잡이를 잡는다. 손 무게에 문이 살짝 열린다.
하지만 순간 손을 떼버렸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물러난다.
내가 들어가서 그 자리에 앉는 순간, 기억은 섞여버린다. 하나뿐인 자리에 다른 기억이 들어오는 순간 원래의 기억은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처럼 추억이 새로운 추억을 만나면 아련함이 사라지고 그저 기억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지난다고 한들 그 예전 추억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마치 파랑새처럼 만나는 순간은 즐거울지라도 그곳을 나오는 순간 파랑새는 검게 변해 더 이상 파랑새가 아니다.
발걸음을 돌린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걷는다. 혼자 어린아이를 다루듯 했던 행적에 헛웃음이 난다. 아까는 들어가지 못해 그렇게 아쉬워했으면서 또 들어갈 수 있을 때는 그러면 안 된다며 피했다. 하지만 더 이상 후회하는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앨범 사진을 넘기듯,
조금 천천히 걷는다.
- 문래창착촌 위치: http://naver.me/FPbqRkCZ [return]
- 창작촌에 있는 카페들은 대부분 공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것이다. [return]